본문 바로가기
지식공간

2차대전을 승리로 이끈 지도자,처칠

by 긍정의 구슬 2023. 6. 18.

처칠

 

1. 처칠의 생애

처칠은 아버지 스펜서 처칠과 어머니 제니 사이에서 삼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말보로공작가문의 7대 손으로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처칠은 학교에서는 낙제생이었고 생활기록부에 따르면 품행이 나쁜 믿을 수 없는 학생 이라고 낙인이 찍혔다.

성적도 하위권이지만 다행히 역사과목은 상위권이었다. 3수 끝에 사관학교에 입학하지만 성적 때문에 기병을 택했다. 처칠은 졸업후 기자로 활동하고 책을 쓰며 보어전쟁에서 포로로 잡혔다가 탈출하여 전쟁 영웅이 되었다. 이런 인기를 바탕으로 보수당 후보로 출마 하원의원에 당선되었다. 자유당으로 옮겨서 식민장관 해군장관을 역임하며 승승장구 출세가도를 달리게 되었다.

1차대전중 작전실패로 장관직을 물러났지만 다시 군수장관으로 입각해 육군장관을 역임했다. 보수당으로 옮겨서 내각 재무장관에 당선되었다. 전쟁가능성을 역설했지만 결국 독일의 침공으로 영국은 풍전등화에 휩싸였다. 그 와중에 총리가 된 처칠은 유명한 연설을 한다.

내가 바칠 것은 피와 땀과 눈물밖에 없다.”

그의 의지로 전쟁은 연합군의 승리로 끝이 났고 처칠은 위대한 지도자로 남게 된다.

 

2. 처칠의 다양한 취미활동

처칠은 정치뿐 아니라 아마추어수준을 뛰어넘는 화가이기도 했다. 1915년 해군장관직에서 물러난뒤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이를 통해 우울증과 스트레스에서 벗어났다. 처칠은 특유의 활기차고 정력적인 모습뒷면에 평생 우울증에 시달렸다. 그림그리기는 그에게 천국과 같은 존재였다. 특히 인상파풍의 풍경화로 유명했다. 그는 아이젠하워의 주선으로 미국에서 회고전을 열기도 했다.

처칠은 신문에 기고한 에세이와 평론외에 소설, 전기, 회고록, 역사서등을 집필하며 작가로도 맹활약했다. 대표작은 6권 분량의 <제 2차 세계대전>과 <영어사용민의 역사>가 있다. 그는 이 작품들로 인해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높은 사회적명성과 귀족가문이라는 신분적 지위 여기에 하원의원, 장관, 총리라는 위치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는 재정위기로 평생 고생했다. 처칠은 독서를 좋아했는데 특히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흥망사>를 좋아했다 그는 산문집을 통해 이렇게 말했다.

설령 책이 당신의 친구가 되지는 못해도 최소한 당신과 일면식이 있는 관계로 묶어둘수는 있지 않은가?”

 

3. 처칠에 관한 일화와 명언 

처칠은 1945년 총선 패배후 1951년 다시 총리에 취임했지만 다른 이에게 물려주고 9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해가 지지않는 빅토리아시대에 태어나 청년시절을 보냈고 대영제국의 전성기에 총리를 지낸 처칠은 대영제국의 마지막 아이콘이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의 인생이 곧 영국의 인생이었다. 2002BBC가 영국인 백만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의하면 위대한 영국인 가운데 처칠이 1위를 차지했다고 한다. 처칠은 평생 시가를 달고 살았는데 그만큼 애연가였다. 시가뿐아니라 애주가였는데 위스키, 코냑, 샴페인등 다양한 술을 즐겼다.

어린시절, 몸이 굉장히 허약햇던 처칠은 시가애연가에 애주가였지만 다행히 장수하는 행운을 누렸다. 그 때문에 담배회사는 처칠에게 감사장을 주었다고 한다. 사실 처칠이 장수한 원인은 그의 그림그리기가 많은 도움을 줬다고 한다. 중년의 우울증으로 시작된 그의 그림그리기는 아마추어수준을 넘어서 개인전까지 열정도로 실력이 좋았다고 한다.

장수비결은 그림그리기처럼 취미생활을 지속적으로 했다는 점이다. 그림을 그리면 마음이 평안해지고 상상력이 풍부해진다. 더불어 스트레스가 완화되고 엔돌핀도 나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노년에는 처칠처럼 취미생활을 적극적으로 할 필요가 있다.

처칠은 수많은 명언을 남겼다. 한번은 처칠이 연단위에 오르려다 넘어져서 청중들이 웃자 마이크를 잡았다.

제가 넘어져서 국민이 즐겁게 웃는다면 다시 한번 넘어지겠습니다.”

옥스퍼드대학에서 졸업식 축사를 하던 처칠에게 환호성이 쏟아졌다.

포기하지마라. 포기하지 마라. 포기하지 마라.”

청중들은 다음 이어질 연설을 기대했지만 이 말을 마치고 처칠은 단상에서 내려왔다. 이 짧은 연설은 오히려 더 유명해져서 대표적인 명언이 되었다.